홍성역사인물

고려의 명장ㆍ재상. 본관은 동주(東州). 평장사 유청(惟淸)의 5세손, 사헌규정 원직(元直)의 아들로 홍주 적동(현재 홍성 홍북 노은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352년(공민왕1)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였다. 1358년 배 400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하여 격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무찔렀다. 1361년에 홍건적 10만이 다시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ㆍ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 여 개경을 수복하였다. 1367년(우왕2)왜구가 연산 개태사에 침입하자, 늙은 몸으로 출정하기를 자원하여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 부원군이 되 었다. 1378년 왜구가 승천부에 침입하자, 이성계ㆍ양백연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84년 문자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ㆍ이동을 요동에 예속 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800여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현 고양)으로 귀양 갔고, 다시 합포(지금의 마산)ㆍ충주로 옮겼다가 개경으로 압송 되어 순군옥에 갇힌 뒤 그해 12월에 참수(斬首)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개경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하였으며,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 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그의 무덤은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적분(赤墳)’으로 불린다.

1316 충청도(忠淸道) 홍주(洪州) 적동리(赤洞里) 노은동(魯恩洞)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짐
1352 조일신의 난 진압
1354 홍건적 진압을 위한 원나라 출병
1357 동북면체북사
1358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 격파
1359 홍건적의 1차 침입으로 서경함락, 생양, 철화, 서경, 함종등에서 적을 격파
1360 서북면순문사로 임면
1361 홍건적의 2차 침입, 서북면도순찰사
1362 홍건적 격파, 김용의 역모 진압
1364 이성계와 협력하여 최유를 몰아냄
1365 신돈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물러남
1373 육도도순찰사
1376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름, 철원부원군
1378 풍덕천에서 왜구 격파
1380 수시중 관직을 받음
1384 문하시중에 임면
1388 팔도도통사가 되어 요동정벌에 나섬, 위화도 회군
1388 개성 순군옥에서 처형

고려의 명장ㆍ재상. 본관은 동주(東州). 평장사 유청(惟淸)의 5세손, 사헌규정 원직(元直)의 아들로 홍주 적동(현재 홍성 홍북 노은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352년(공민왕1)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였다. 1358년 배 400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하여 격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무찔렀다. 1361년에 홍건적 10만이 다시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ㆍ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 여 개경을 수복하였다. 1367년(우왕2)왜구가 연산 개태사에 침입하자, 늙은 몸으로 출정하기를 자원하여 홍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 부원군이 되 었다. 1378년 왜구가 승천부에 침입하자, 이성계ㆍ양백연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84년 문자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ㆍ이동을 요동에 예속 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800여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현 고양)으로 귀양 갔고, 다시 합포(지금의 마산)ㆍ충주로 옮겼다가 개경으로 압송 되어 순군옥에 갇힌 뒤 그해 12월에 참수(斬首)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개경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하였으며,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 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그의 무덤은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적분(赤墳)’으로 불린다.